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근/야구 스타일 (문단 편집) ==== 한화 감독 이전까지의 김성근 : 투수 운용의 신 ==== 김성근의 선진적인 투수 기용은 첫 프로 감독 시절인 OB 베어스 시절부터 나타나는데, 1984년 당시 [[윤석환]]을 마무리 투수로 기용하여 57경기 146이닝 12승 8패 25세이브 평균자책점 2.84의 성적을 거두었다.[* 당시 윤석환을 KBO 최초의 마무리 투수로 보기도 하나, 장기적으로 기용되지 못했기에 보통은 1985년부터 마무리로 전업한 삼성의 [[권영호]]를 역사적인 첫 마무리 투수로 인정한다.] 이는 선발이 완투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기 기준으로는 파격적인 기용이었으며, 당시 OB 베어스는 전후기 통합 승률 1위를 기록하였다.[* 다만 당시에는 전기 리그 1위와 후기 리그 1위가 한국시리즈를 치르던 시기였으며, 김영덕 감독의 져주기 사건으로 OB 베어스가 후기마저 2위를 기록하면서 우승에는 실패하였다.] 마무리 투수가 80년대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 시기 마무리는 지금의 1이닝 마무리의 분업화 체제가 아니라 중무리가 일반적이었고,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김응용이 선동열 선발로 쓰면 매일 못 쓰니까 스윙맨으로 썼고 그런 인식 자체가 당연했을 정도로 보직, 로테이션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90년대 LG 이광환 감독이 당대 선진문물이라는 라루사이즘을 가져와서 우승까지 이끌었지만 아직 완전히 정착되지는 못했었다. 더군다나 80년대는 프로팀이라는 팀들이 로스터를 다 채우지도 않고 대충 있는 선수 모아서 시합을 하지 않나 여튼 프로야구가 출범은 했지만 아마추어 티를 완벽히 벗지 못한 시기였다. 상술하였듯이 김성근 감독은 이 시기 중무리이기는 해도 마무리 개념을 처음 도입하였으며, 쌍방울 때부터 시작한 "벌떼야구"는 불펜 중심 야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지금에야 보면 그냥 무식한 살려조 전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땐 그냥 어제 던진 선수가 오늘 던지고 내일도 던지고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권혁]]이 맨날 나와서 혼자서 다 던지는 것처럼 보여도 80-90년대는 살려조 3~4명 정도면 대단한 분업 야구였던 것. 즉 한 명이 질 부담을 몇명이 나눠서 지는 수준만으로도 차원이 다른 효율을 발휘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로서는 홈 어드밴티지처럼 여겨지던 [[마운드]] 높이 조절 등 타 감독은 생각지도 못한 장외 전술[* 마운드 높이가 10인치로 고정된 현재와는 달리 당시에는 규정 이내에서는 자유롭게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었고, 이것이 지금의 구장마다 다른 외야 넓이처럼 홈 어드밴티지처럼 여겨지는 시절이었다. 김성근의 쌍방울은 언더핸더들을 주축으로 삼고 상대팀의 정통파 투수들의 위력은 감소시키고, 자팀 언더핸더들의 공의 위력이 강해지도록 마운드를 깎는 장외 전술을 사용해서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을 이용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비단 쌍방울 뿐만이 아니라 태평양이나 SK 등 성과를 낸 팀 거의 모두에서 투수력을 위주로 성과를 냈는데, 이는 타 감독과 차별화되는 불펜 쏟아붓기나 무엇보다 [[플래툰]]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감독이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과는 달리 플래툰을 잘 하지 않았고, '좌우놀이'라는 비하적 표현이 당연시되었다. 당시 한국은 [[정수근]]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수를 삐꾸로 만든다' 로 할 정도로 플래툰에 부정적이었으며, 이런 분위기가 무려 00년대 후반까지도 이어졌다. 좌우 편식없이 잘 하는 타자/투수가 진정 실력있는 선수고, 플래툰 시스템은 약점을 피해가는 치사한 짓, 반쪽짜리 선수가 되는 길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아마추어 야구의 낭만, 나쁘게 보면 안일함이 00년대 후반까지도 남아있던 것. 지금도 그 시절 00년대에 작성된 나무위키 문서들을 보면 이런 그 시절 야구관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서도 쓰는 감독만 쓰던 투수 플래툰을 적극적으로 쓰는 감독이었으니, 당시로서는 정말 선진적인 감독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누구나 다 하니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일지 몰라도 뭐든지 처음 하는 건 아무나 못 하는거다. 더군다나 쥐어짜내기의 달인답게 정말 극한의 투수 쥐어짜내기를 보여주었는데, 대표적으로 용병제도 도입 이후 관습적으로 투1/타1로 선발하던 용병메타에서 선발 2명을 외인으로 뽑고 선발 자리에 들어갈 한국인 투수를 스윙맨으로 돌리는 운영을 선보여서[* 엄밀히 말하면 김성근이 처음은 아니었고 당대 두산이나 삼성도 선발 2명을 뽑았지만, 두산은 우즈 이후 모든 타자용병이 다 망했을 정도로 넓은 잠실야구장이라는 여건상 타자용병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에, 삼성은 선동열 감독이 워낙 투수야구를 좋아했기에 팀 사정상 하는, 외국인 타자의 공격력을 포기하는 고육지책 내지는 기책으로 평가되었지 정석적인 전략으로 평가되진 않았다. 이게 효율적인 전략으로 재평가된 계기가 김성근의 07SK 우승.] 07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함으로서 메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외인 2명을 선발로 놓아서 선발도 강했고, 원래라면 4-5선발 정도는 충분히 돌 실력의 한국인 투수를 스윙맨으로 쓰니 불펜도 강했던 것. 거기다가 우천 취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감독이었는데, 일기예보를 보며 우천 취소까지 불펜 투수 휴식에 활용해서 조금이라도 더 짜먹을 수 있었던 것. 김성근이 데이터 야구의 선구자라고 하는데, 이런 점도 포함된 것이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시절엔 비온다 하면 하루 쉬니 개꿀 정도로 생각했지 휴식일에 우천까지 염두에 두고 운용을 하는 감독은 없었기에 투수 운용의 대가 소리를 들은 것. 여튼 현재 와서 현재의 기준으로 평가하려니 이상하다 하는 것이지 그 시절은 분명 선진적인 운용을 보여준 감독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점 뒤쳐져 갔으나 그의 전성기에는 분명 KBO리그에서 선진적인 투수운용을 보여준 감독이었고, 특정 인물을 부정하고 싶을 때 과를 강조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거짓말까지 해가며 공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정말 치졸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